삼국지 (15) 썸네일형 리스트형 <제3화> 영제 시대의 실세? 영제가 제위에 오른 후 청류파 사족 집단을 대표하는 진번과 두태후의 아버지 두무는 중상시 일파를 미워하였습니다. 진번이 두무에게 말하였습니다. “조절과 왕보 등이 먼저 돌아가신 환제 시절부터 나라의 권력을 잡고 농단하여 온 나라를 혼탁하게 하고 어지럽히니 지금 그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이후에는 반드시 그들을 도모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진번과 두무는 전 황제 환제 시절부터 국정농단의 주역인 환관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상서령 윤훈을 끌여들여 마침 하늘에 일식이라는 변고가 일어난 것을 기회로 이들을 처단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진번이 두무에게 제의를 하였고 아버지 두무는 황후인 두 태후에게 환관 제거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전에는 환관들이 궁중의 드나드는 곳에서만 일을 해왔는데 현재는 정사에 관여하고 중요한 권한.. <제2화> 한(漢) 조정의 대응 https://www.youtube.com/watch?v=htw0IObSy1E황건적의 난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영제가 하태후의 오빠인 하진을 대장군에 임명하고 낙양 주변의 8개 관문을 설치하고 각 관에 도위를 배치하여 방어를 강화했다고 소개하였습니다. 황건적들의 초기 기세는 천지를 진동할 정도였습니다. 태평도들이 머물고 있던 지역은 그 지역 관부를 불태우고, 촌락과 읍을 약탈하기 시작하자 주와 군은 그 거점을 상실하였고, 높은 직급의 관리들은 대부분 도망쳤습니다. 한 달로 안되는 사이에 반란의 흐름은 동부에서 서부로 전파되었고 안평(하북성 기현) 사람들은 안평왕 유속을 사로잡고, 감릉(산동성 청평현) 사람들은 감릉왕 유충을 사로잡아서 황건적에 호응하였습니다. 원래 제후왕들은 중앙 황실의 울타리 역할이 기대.. <제1화> 황건적의 난 https://www.youtube.com/watch?v=RH1ZcKm8wqg 184년 후한 말기는 난세 그 자체였습니다. 서방에서는 강족이 빈번하게 쳐들어오고 메뚜기떼는 창궐하였습니다. 후한 조정에서는 국세 수입은 줄어들지만 지출할 곳은 늘어만 갔습니다. 삼촌인 환제에 이어 황제에 오른 조카 영제는 해결책을 매관매직에서 찾았습니다. 과거 명예직인 작위만 돈을 받고 팔았던 전통을 뛰어넘어 지방관직을 돈을 받고 판다는 기발한 생각을 실천에 옮긴 것입니다. 영제가 관직을 팔기 시작한 지 10년 만인 184년 황건적의 반란이 낙양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이전부터인 희평(172-177) 연간에 전한의 수도 장안 인근에서 낙요는 은신술을 비롯한 이적을 보이며 무리를 모았고, 광희(178-184년) 연간에는.. 치세의 팔준, 난세의 골리앗 유표 魏7 유표는 키가 8척이 넘고 자태와 용모는 위엄이 넘쳤다. 어려서부터 유명하여 팔준이라고 불렸다. 사마표의 전략(戰略)에는 유표가 형주자사로 발령을 받았으나 형세가 위태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단신으로 부임하여 원술의 위협하에 놓인 정세를 괴월과 상의하였다. 괴월이 "치세에는 인의를 앞세우고, 난세에는 권모를 앞세운다"면서 내놓은 계책을 따라 도적의 우두머리를 회유하여 55명 모두를 참수하였다. 원술과 함께 쳐들어온 손권을 유인하여 유시로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장제가 처들어왔으나 물리쳤고 장선과 그의 아들 장역을 공격하여 남쪽으로 영릉과 계양을 되찾고, 북쪽으로 한천을 점령하여 영토는 수천리에, 군사는 십수만이나 되는 영역을 다스렸다. 하지만 조조와 원소가 싸우는 관도대전에서는 나이가 들어서인지 관망만 하였.. 악당으로 보이고 싶은 사이코패스 동탁 魏6 동탁은 삼국지 최강의 악당으로 불려도 별다른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는 황제를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제에서 헌제로 바꾸었으며 백성들이 2월 토지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있는 것을 보고 남자의 머리는 전부 베어 떨어뜨리고 여자들은 사병들에게 주어 종이나 첩으로 삼도록 하였다. 심지어 궁녀나 공주까지 간음하고 음란한 짓을 했다고 기록되었다. 왜 이런 실익은 없고 악명을 남길 것이 명확한 악행을 저질렀을까. 성격이상자일까? 동탁은 장막을 설치하고 술을 마시다가 북지군의 항복한 반란군 수백 명을 끌고 오라고 명령하였다. 좌중이 보는 앞에서 그들의 혀를 자르고 손발을 절단하고 눈을 뽑아 큰 가마솥에 삶았다. 또 죽지 않은 자는 땅에 엎드린 채로 술잔 사이를 왔다갔다 하게 하니, 모인 사람들이 벌벌 떨며 그릇과 .. 실력보다 꿈이 컸던 인물 원술 魏5 원술은 원소와 이복형제였다. 하지만 서로 협력하기에는 생각이 달랐다. 시대가 혼란하고 집안이 명문가였으므로 꿈이 컸다. 하지만 천자를 꿈꾸기에는 실력에 비하여 너무 넘친다는 평가를 받은 듯하다. 친한 사이였던 진규를 같은 편으로 만들고자 편지를 보냈지만 그 답장에는 "법규도 없는 계략을 몰래 세워 직접 화를 시험하는 모습을 보니 어찌 애통하지 않으리! 만일 그대가 길을 잃었다가 돌아올 줄 안다면, 오히려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오. 나는 그대의 옛 친구이기 때문에 그대에게 진실한 마음을 털어놓는 것이오. 비록 듣기 좋은 말은 아니지만 육친의 애정이 들어 있소. 내가 사사로움을 좇아 그대에게 아부하기를 바란다면 나는 죽음에 처하더라고 할 수 없소." 라는 기대이하의 반응이 담겨 있었다. 천자가 되려고 하자.. 추락한 금수저 원소 魏4 정사에 따르면 원소는 대장군의 부하였다가 시어사가 되었으며, 얼마 후 중군교위로 옮겼다가 사예교유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었다. 원소가 대장군 하진의 부하로 있을 때는 상황파악을 잘하였다. 하진이 환관들을 제거하려고 하였다가 그들이 사죄하자 마음을 바꾸었다. 부하인 원소는 이 기회에 그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진언했지만 하진은 동의하지 않았다. 결국 환관들은 하 태후의 명을 빌려 하진을 유인하여 살해하였다. 혼란이 일어났으나 원소는 환관들을 베고 병사들을 지휘하여 주도권을 장악해 나갔다. 사태가 동탁이 실권을 장악하는 쪽으로 흘러가자 원소는 결단을 내려 기주로 도망갔다. 명사였던 주밀, 오경, 하옹 등이 은밀히 원소를 지원할 정도로 원소는 신망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순욱이나 정욱이 원소보다 조조를 높이.. 실권없는 금수저 유선 蜀2 중국사에 등장하는 왕조의 숫자는 한국보다 훨씬 많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왕조만 따져보아도 한국통사에 등장한 왕조보다 더 많은 나라가 명멸했다고 볼 수 있다. 수많은 역사속의 영웅들이 새로운 왕조를 창업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초심은 사라지고 부패와 무능 속에 무너져가는 것도 자연법칙 같아 보인다.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도 자신의 딸 둘을 바라보며 "너희는 어찌하여 이 집안에 태어났는가?" 라고 말하면서 두 딸을 죽이고 자신도 목을 매었다고 한다. 그런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중국에서 삼국시대에 유비가 세운 촉은 유비, 유선 2명의 황제로만 이루어진 단명한 왕조중 하나이다. 유비의 비(備)는 준비한다는 의미이고, 유선의 선(禪)은 사양하다, 선위하다라는 의미가 있어서 선위를 준비한 왕조였다고 폄훼하는 말들이.. 괄목상대(括目相對) 여몽 吳3 삼국지에서 오나라 여몽은 입지전적인 인물의 1번 타자라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열대여섯 살의 어린 나이에 군대에 자원입대하였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어머니가 화를 내자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가난과 미천함은 참아 내기 어려운 것입니다. 잘못을 벗어 버리고 공을 세우면 부귀가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또 호랑이 굴로 들어가지 않고 어찌 호랑이 새끼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단순히 가난을 면하기 위하여 군에 들어갔다면 삼국시대(184~280년)에 그런 인물들은 부지기수였을 것이다. 역사에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못하고 단지 삼국지에 수없이 등장하는 백만 대군의 한 병사로 삶을 마감했을지도 모릅니다. 후한 시대 말기의 중국 인구가 5,000만 명이었다가 약 100년 후인 진나라가 천하를 통.. 강동을 흔들었던 인물, 손권(孫權) 吳2 손권은 유비나 조조처럼 창업 세대가 아니라, 아버지와 형의 가업을 이은 후계자 그룹으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오나라의 손권은 18세의 어린 나이에 손책에 이어 한나라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손견이 유표와의 전투에서 황당하게 전사하고 난 뒤 동오를 이끌던 믿음직한 형 손책이 허공의 자객들에게 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졸지에 당한 일이라 그저 형의 죽음 앞에서 눈물만 흘릴 따름이었습니다. 그런 손권을 일으켜 세운 인물이 장소였습니다. 장소는 형 손책이 사부로 모시는 중신이었습니다. 장소 때문에 손책의 위광이 가려진다는 평판까지 나올 정도의 힘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손책은 그릇이 큰 지도자였습니다. 춘추전국시절 관중이 일을 잘하면 제나라 환공의 위세가 올라갔듯이 장소가 명성을 떨치는 것이 손책 .. 유비 밑의 공명, 유비 없는 공명. 蜀1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가장 최고의 지성을 갖춘 인물을 들라고 하면 단연 제갈공명이 첫 손가락을 차지할 것입니다. 제갈공명(181~234)은 단연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수재였습니다. 어쩌면 삼국지를 뛰어넘어 중국 통사를 살펴보아도 공명에 비견한다고 공감될 만한 인물을 찾는다는 것은 쉬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수가 저술한 정사 삼국지에서도 제갈량은 선주 유비와 후주 유선에 이어서 단독으로 한 전(傳)을 독차지하고 있고, 표제로 '세상 다스리는 이치를 꿰뚫은 불세출의 정치가'로 압축되어 설명되고 있습니다. 평소 공명은 자신의 롤모델이 관중과 악의라고 동문수학하는 벗들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관중은 춘추시대에 포숙아의 천거로 제나라 환공에게 등용되어 주군을 패자로 만든 인물이고 악의는 전국시대 .. 삼국지 최고 아이돌 주유 吳1 삼국지 영화를 만들때 출연료가 가장 비싼 사람은 주유 역을 맡은 배우라고 합니다. 캐릭터상 미남에 음악에도 뛰어난 배우여야 하기 때문에 당대의 스타가 주로 맡는다고 합니다. 최근 에서 배우를 캐스팅할 때도 처음에는 배용준으로 정해졌다가 우여곡절 끝에 양조위가 맡아서 촬영하게 되었습니다. 실제 주유의 후손이라고 알려진 주윤발도 미남이고, 정사에는 주유가 건강하고 자태와 용모가 뛰어났다는 표현과, 어릴 때부터 음악에 정통하여 비록 술을 많이 마신 뒤에도 틀리게 연주를 하면 반드시 돌아보아서 "곡에 잘못된 점이 있으면 주랑이 돌아본다"는 말이 당대에 퍼졌다고 합니다. 실제 적벽대전에서 주유는 노숙과 더불어 주전론을 주장하는 것을 보면 카리스마가 넘치는 커다란 꿈이 있는 인물이었다고 생각됩니다. 36세의 이른 .. 도광양회의 달인 순유 魏3 순유는 젊은 시절 정의감에 불타서 동탁의 무도함은 걸주보다도 심하다면서 동탁을 직접 죽여서 백성을 위로하고 천자의 명령을 보좌하자는 의거를 모의하다 발각되어 옥에 갇혀 처형당할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습니다. 운좋게도 왕윤이 여포와 함께 동탁을 제거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게 됩니다. 하지만 훗날 조조가 위공으로 작위를 승진시키며 야심을 드러내자 순욱은 죽음으로 반대했으나(건안17년 212년), 순유는 말년에 조조의 위왕에 찬성을 합니다. 목숨을 걸고 한실을 지키려던 젊은이가 늙으면서 생각이 달라졌다고 봐야할 것인가 생각하게됩니다. 진수의 삼국지는 순유를 순욱과 같은 급으로 순욱 바로 아래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순욱도 조조가 자신을 대신할 수 있는 인물을 묻자 '순유와 종요' 두 사람을 들었습니다. 순욱의 .. 삼국지 위나라 왕좌지재 순욱 魏2 순욱은 명문가의 후예였다. 조부, 친부, 숙부 모두 고위관료였고 어린 시절 이미 왕좌지재를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당대의 흐름을 읽는데도 뛰어난 감각이 있었다. 관직에 임명되었어도 이를 버리고 고향으로 가 촌로들에게 지금 영천 땅은 위태로우니 서둘러 떠나라고 권했으나 마을 사람들은 소돔 땅에 살던 사람들처럼 떠나지않고 살다 화를 입었다. 그는 원소를 버리고 조조를 선택했다. 조조는 순욱을 장자방이라고 칭하고 사마에 임명하니 제갈공명 출사보다 2살 많은 29세 였다. 순욱은 여포와의 전투 등 중요 고비마다 조조가 안심하고 뒷일을 맡길 수 있는 미더운 인물이었다. 게다가 순유와 종요를 추천하고 희지재, 곽가, 엄상과 위강 등 수많은 인재들을 천거했다. 조조가 원소와의 싸움에서 힘겨워 할 때 그는 필승.. 처세의 달인 가후 魏1 가후는 삼국지 위지에서 순욱, 순유와 같은 위치에 놓였던 인물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더 노련한 측면도 존재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존재감없는 존재였다. 집안이 평범했었는지, 아직 재능이 알려질 기회를 얻지 못했던 듯하다. 하지만 저족에게 잡히면서 다른 사람과는 달리 단공의 외손자라는 기지를 발휘하여 위기를 모면한 것을 보면 임기응변에 능한 재능은 갖추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동탁이 죽은 후 도망칠 생각만 하던 이각에게 살아날 묘책을 알려준 것으로 후세에 비판을 받았지만, 가후 입장에서는 자신도 살려는 묘책이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헌제를 위하여 기책을 구상한 것을 보면 나름 사리사욕만을 추구하는 인물은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장수의 참모시절, 조조를 추격할 때 처음에는 가지 말라고 했다가 패한 장수를 격려하..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