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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삼국지 최고 아이돌 주유 吳1

삼국지 영화를 만들때 출연료가 가장 비싼 사람은 주유 역을 맡은 배우라고 합니다. 캐릭터상 미남에 음악에도 뛰어난 배우여야 하기 때문에 당대의 스타가 주로 맡는다고 합니다. 최근 <적벽대전>에서 배우를 캐스팅할 때도 처음에는 배용준으로 정해졌다가 우여곡절 끝에 양조위가 맡아서 촬영하게 되었습니다. 실제 주유의 후손이라고 알려진 주윤발도 미남이고, 정사에는 주유가 건강하고 자태와 용모가 뛰어났다는 표현과, 어릴 때부터 음악에 정통하여 비록 술을 많이 마신 뒤에도 틀리게 연주를 하면 반드시 돌아보아서 "곡에 잘못된 점이 있으면 주랑이 돌아본다"는 말이 당대에 퍼졌다고 합니다.

 

실제 적벽대전에서 주유는 노숙과 더불어 주전론을 주장하는 것을 보면 카리스마가 넘치는 커다란 꿈이 있는 인물이었다고 생각됩니다. 36세의 이른 나이에 사망하였으므로 뜻을 펼쳐보이지도 못했지만 주유가 품었다는 천하이분지계가 현실 속에서 실현되었다면 삼국지의 스토리는 또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유와 노숙이 일찍 죽지않고 살았더라면 훗날 손권의 폭주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었을 것이고 오나라가 허망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역사에 가정은 없다는 점을 알고있으면서도 떠오르는 생각입니다.

 

주유는 손권의 형 손책과 동갑이고 10살때부터 친한 사이라고 합니다. 훗날 주유와 손책은 강동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환현을 공략해서 함락시켰는데 그 곳의 교공의 두 딸을 포로로 잡고보니 모두 천하의 절색이었다고 합니다. 손책은 언니인 대교를 아내로, 주유는 동생인 소교를 아내로 삼아서 동서지간이 되었다고 하는데, 손책은 이미 그전에 결혼을 한 바 있고 두명 모두 남편과 합장되지는 못했으므로 첩이었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오나라의 왕과 참모총장이 같은 교씨 자매의 동서지간이 된 케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세기 초 중국의 4대 명문가는 송씨, 장씨, 진씨, 공씨 가문인데 진백달은 이 4대 가문을 타도 대상으로 삼기도 했었습니다. 송씨 가문의 송가수의 3자매중 애령은 공자의 후손이며 중국 최고의 부자인 공상희와 결혼했고, 경령은 혁명가 손문과 결혼했고, 미령은 장개석과 결혼한 사례가 비숫한 경우라고 생각됩니다. 삼국시대 당시 강동에도 유력한 4대 가문이 존재하였는데 주유의 주씨는 무예가 강하고, 육손의 육씨는 충성스럽고, 고옹의 고씨는 인간성이 좋고, 촉에 사신으로 갔던 장온의 장씨는 학문이 뛰어난 특성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오나라는 호족의 세력이 강성했다는 특성이 강했는데, 위나라 조조가 한나라 헌제의 권위를 내세우며, 승상의 위세를 등에 업고 강력한 중앙집권을 이루었으며, 촉은 유비의 카리스마로 초기 탁현 출신과 형주 출신, 익주 출신이 통합되었다면, 오나라는 주군과 신하 사이의 신뢰관계가 약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오나라의 군사제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나라의 병력은 상비군이 아니라 오나라 무장들이 직접 개별적으로 모집하는 경우가 많았고, 무장이 죽으면 장수의 아들이나 동생이 이 병력을 그대로 이어받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나라 병사들은 사병의 성격이 강했고 군단의 독립성이 강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려 말에 함경도 변방의 장수의 불과하였던 이성계가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고려의 장수들과는 달리 원나라의 다루가치였던 이성계 가문에 대대로 사병처럼 복종하던 가별초라른 기마부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합니다. 조선이 건국된 후 정도전과 이방원의 싸움인 1차 왕자의 난과 이방원과 이방간의 싸움인 2차 왕자의 난의 원인이 사병혁파에 대한 반발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손권이 호족 세력과 심각한 갈등을 보인 것도 권력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있는 갈등이라고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후한 말기 혼란기의 강동에서는 기존의 호족들과는 다른 손견이라는 전투에 능한 신흥 가문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는데, 차츰 세력을 규합해나가다 그만 전사하면서 기세가 꺽이고, 큰아들 손책은 원술 밑에 있다가 독립하였는데,, 손책과 뜻이 맞았던 주유는 원술이 자신의 부하로 쓰려고 하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손책과 의기투합합니다. 주유의 벗이었던 손책이 호족 세력에 의하여 암살을 당하자 다른 호족들은 동요했지만, 주유가 나서서 친구의 동생인 손권을 군주로 추대하며 신하의 자세를 취하자 다른 호족들도 안정을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손권의 어머니 무열황후 오씨도 손권에게 주유를 아들처럼 대접하겠으니 손권도 형으로 대접하라고 말할 정도로 깊은 신뢰를 받았습니다. 적벽대전에서 대다수의 신하들은 안정을 찾아 조조에게 투항론을 주장하였지만, 주유는 주전론을 주장하며 1.오나라는 수전에서는 우세하고, 2. 조조에게는 마초, 한수와 같은 후환이 있으며, 3.겨울이라 말에게 먹일 풀이 부족하고, 4. 조조군은 풍토가 다르므로 질병에 약하고 5. 조조는 한황실의 역적이며, 6. 강동의 군사적 이점이 많아 우세하다고 주장하여 주전론을 관철시킵니다.

 

나관중은 적벽대전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하면서 공명이 주유를 도발하기 위하여 조조의 3째 아들이 지은 동작대부라는 시에서 이교(二橋)를 이교(二喬)로 표현을 바꾸는 계책으로 조조가 교씨 자매에 관심을 나타냈다고 미혹시켜 주유의 항전을 유도했다고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적벽대전에서 주유는 황개의 거짓 항복작전을 통하여 서전을 승리로 장식하고 조조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합니다. 오나라와 촉은 서로 연합하면서도 주유가 유비의 인물을 알아보고 제거하려는 계책을 구상하였고, 유비는 손권에게 주유의 기량을 칭찬하면서 주유가 남의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며 군신간에 이간책을 쓰기도 했다고 합니다.

 

주유는 인물, 재능 성격 모두 좋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연장자인 정보가 주유를 자주 모욕을 주었는데 주유가 깍듯이 대하자 결국 감복하며 주유와의 사귐은 향기로운 술을 마시는 것처럼 마시는 사람이 취함을 느끼지 못한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제갈공명의 형 제갈근과도 친밀한 사이로 주유의 자가 공근(公瑾)이고, 제갈근의 자는 자유(子瑜)로 서로 상대방의 이름을 서로의 자로 사용하는 것이 이를 보여주는 것의 증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나관중은 주유가 공명을 질투하며 "하늘은 어찌하여 주유를 낳고, 또 공명을 낳았단 말인가"라는 극적인 말을 남긴 것으로 묘사하였지만, 실제로는 길고 짧은 것이 인생이니 슬퍼할 필요가 없다면서, 자신의 후임으로 노숙을 천거하면서 생을 마감합니다.

 

주유의 딸은 손권의 태자 손등의 부인이 되었고, 손권은 주유의 장례식 경비를 모두 부담하였고, 주유와 정보의 집안에게는 부세와 요역을 면제하는 특혜를 베풀기도 하였지만, 주유 집안은 아들 2이 있었으나 장남은 요절하고 차남은 유배형을 받았고 딸은 태자비가 되었으나 손등의 요절로 과부가 되는 등 박복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주유의 두줄평을 하자면,

살아서는 외모와 재능 모두 넘치는 복을 받았지만,

죽음이 너무 빨리 찾아오면서 넘치는 복을 모두 흘려버리는 안타까운 삶이었다는 평가를 내리게 되었습니다